내 평생 살면서 영어로 싸울 일은 아마 여기서 일하는 동안 다 겪었을 것이다. 사실 싸운다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의 감정 소모였다. 세상 모든 사람 상대하는 일이 그렇다지만 코로나가 터지면서는 정말 극한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웃프지만 나의 영어도 동시에 늘어갔다.
📋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수하물 무게 초과 요금, 비자/리턴 티켓 미비로 인한 탑승 거부, 원하는 자리 선택 불가 등으로 발생하는 언쟁들은 자연스레 감수해야 하는 업무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정말 이해가 힘든 경우들이 있다. 이코노미를 예약했지만 본인은 키가 크다는 이유로 비즈니스로 무료 업그레이드를 당당하게 요구한다거나 사전 신청하지 않아 이미 마감된 아기 요람석을 줄 때까지 드러누워 버티는 사람도 있었다. 보통 이런 경우는 언행도 매우 무례하다.
특히 인도발 비행의 경우 한 비행 편에 많으면 100명까지도 휠체어 서비스를 신청하는데 대부분이 신체가 건강함에도 그냥 긴 게이트를 걷고 싶지 않은 게 이유다. 이렇게 되면 정말로 서비스가 필요한 손님들이 불편을 겪기 때문에 걸을 수 있으면 최대한 걸어 달라고 부탁하다가 얻어맞아 본 적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입국장 밖까지 나오면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나 택시를 잡으러 뛰어간다.
이렇다 보니 매너가 좋은 손님들에게 더 잘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규정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직원 재량이 있기 마련이고, 스몰 토크로 시작해 혹시 가능하다면 비상구 좌석을 줄 수 있냐고 예쁘게 묻는 손님들에게 우선순위를 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우리도 언제든 승객이 되기도 하고 그 마음을 이해하는 입장으로서 어떻게든 업차지도 피해주려 노력한다.
📋 매일매일이 전쟁이다
그러던 와중 역사에 길이 남을 코로나-19가 발발했다. 직격타를 맞은 항공 업계에서 매일을 보냈던 나는 날이 갈수록 상황이 겉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던 이때의 하루하루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처음엔 중국발 폐렴이라고 불렀다. 다들 “그 뉴스 봤어?” 정도로 시작했고 COVID-19라는 명칭이 붙여지기도 전에 우리에게는 회사 차원에서 방역용 마스크가 지급되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마스크를 쓰는 것이 과해 보였었다.
대기 간격 2m 준수, 탑승 전 발열 체크, 비행기 좌석 제한 등이 서서히 시작되었고 하루가 다르게 변경되어 전달되는 국가별 공문 때문에 날마다 브리핑이 길어져 갔다. 어제까지는 이 나라에 갈 수 있었는데 하루 사이에 갈 수 없어지는 경우가 빈번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어마무시한 컴플레인이 따랐다. 몇 주 동안은 거의 전쟁터였다. 특히 다른 도시에서 넘어와 여기서 환승 편을 이용할 예정이었던 승객들의 탑승을 거부해야 할 때가 가장 힘든 경우였다. 현장에서 모든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고 고군분투 끝에 그 날의 비행기가 뜨고 나면 모두들 진이 빠진 상태로 퇴근했다.
📋 그러면서 영어가 늘어간다
이제까지는 같은 상황에 한국어로는 했을 말을 영어로는 안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영어로 정확히 표현하려면 한마디 한마디를 하는 것 자체에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다 보니 그냥 참고 넘어가는 게 더 편했다.
하지만 일적으로 컴플레인을 겪는 건 달랐다. 대체로 상대가 흥분한 상태였으니 말의 속도가 정말 빨랐고, 그 속도에 맞춰 어떻게든 대답을 해야 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그렇게 막힘없이 말을 하고 있었다.
이제껏 나의 편견도 있었던 것이 괜히 언성을 높이고 싶지 않아서 (영어로 싸워서 이길 자신도 없고) 상대의 혼잣말은 들어도 못들은 척 넘어가곤 했었는데 그런 말들에 참지 않고 내가 왜 이렇게 해야 하는 지를 자세히 따져 설명하면 오히려 나에게 고마워하며 본인의 발언에 대한 사과도 뒤따랐다.
확실히 말발이 늘어가고 있었다. 이때쯤 우리 항공사 풀에 새롭게 들어온 친구가 있었는데 이런저런 얘기 중 “너 여기서 태어났지?”라기에 온 지 몇 개월 안되었다고 하니 깜짝 놀라며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처럼 들린다는 말을 해줬다. 이때도 한참 부족했지만 영어 못해서 서러웠던 날들을 지나 내 인생에 이런 말을 듣는 날이 다 오다니 고생과 노력을 살짝은 보상 받는 기분이었다. 역시 언어는 싸우면서 가장 빨리 는다는 말이 맞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