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수직적인 직장문화가 익숙하다면 영미권의 사회생활에는 득이 될 수도 반대로 실이 될 수도 있다. 아시안들은 똑똑하다, 수학을 잘 한다와 같은 말들이 인종 차별적인 뉘앙스로 쓰일 정도로 어떻게 보면 그만큼 평균적인 능력치가 좋은 것이라 보는데 특히나 한국인들이 일 잘한다는 이미지가 확실히 있다. 우리나라에서 다들 기본적으로 하는 평균치만 하더라도 그들에겐 성실한 편에 속하기도 한다. 말도 잘 못하던 뉴질랜드 시절부터 캐나다를 거쳐 한국에서까지 정말 다양한 외국인 동료/거래처들과 일을 해보았지만 개개인의 언어적 한계를 제외하고는 일하는 속도, 눈치, 태도, 멀티플레이 등 여러 면에서 한국인들이 일머리 하나는 월등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이것들이 어릴 때부터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왔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한국인의 사회생활 스킬
개인적으로 내가 써먹었던 나름의 유교 스킬?은 고참 선배들과 매니저들에게 자리 양보하기, 무거운 짐을 들고 가고 있으면 같이 들어주기, 잡일을 하고 있으면 내가 대신 한다고 하기 등등이 있었다.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누군가에게 특정된 업무는 아닌, 한국이라면 너무나 신입들이 할 법한 일들을 상급자들이 하고 있기도 했었고 그걸 떡하니 봤는데도 그냥 지나치기 뭣해 do you want me to do that? 하는 식으로 웃으며 말하면 다들 정말 고마워하고 좋아했다. 한 번 이라도 더 대화를 하면서 좋은 관계성을 쌓아갈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이런 것들은 당연히 기본적인 본인의 듀티를 제대로 잘 해낸다는 전제 하에서 플러스 요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이때의 나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마인드였고 오히려 이런 행동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뭐든 과유불급이다.
북미의 젠지들
이 나라의 젠지들은 5시 퇴근이면 5시 땡 하자마자 말 그대로 손에 잡고 있던 일도 그 자리에 내려놓고 퇴근을 한다. 이건 뭐 뉴질랜드 시절부터 많이 봐와서 익숙했지만 이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는 그날 하기 싫은 듀티를 배정받았다거나 업무 특성 상 갖춰야 하는 기본적인 모습(full 유니폼 착용, tied up 헤어 등)을 지적하는 게 싫다고 매니저와 싸우는 애들도 있었다. 이전 글에서 말했던 것처럼 업무 태도가 심각하고 거기에 일까지 못한다면 해고가 될 수도 있겠지만(북미권의 해고는 우리나라와 달리 정말 살벌하다.) 다들 어느 정도 연차가 있는 친구들이었고 대체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크게 터치하지 않는 듯 했다. 각자 개성도 넘치고 재밌는 친구들이었지만 상급자는 상급자이고 굳이 불필요한 적대적 관계를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쌓여 언젠가 본인에게 불이익으로 돌아오는 순간이 온다.
할 말은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전형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좋게 평가 받는 행동들이 긍정적인 효과만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캐나다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된 지인이 일을 완벽히 해내고 싶은 마음에 종종 야근을 했는데 그게 반복되자 동료들이 우리의 문화를 망치지 말아달라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이제는 한국 내 인식도 많이 바뀌어가고 있는 것처럼 맡은 일을 실수 없이 제 시간 안에 집중해서 끝내는 것이 하나의 능력으로 인정받는 사회다. 물론 이들도 절대적인 업무량이 많으면 야근도 하고 급하게 처리할 용건이 있으면 휴가 중에도 일을 한다.
또한 기본적인 예의와 업무 능력만 갖췄다면 할 말은 당당하게 할 줄 알아야 한다. 꾹 참고 가만히 있으면 절대 누군가가 먼저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본인이 처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모든 게 시니어리티순인 이 회사에서 한동안 밤낮없이 불려나가던 때가 있었는데 매일 같이 근무 몇 시간 전 콜씩을 하는 동료들 때문에 몇 안되는 인원으로 엄청난 양의 일을 쳐내야만 했었다. 이런 상황이 일주일쯤 반복되자 정직하게 시프트를 받는 사람만 호구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짤릴 것을 각오하고서 헤드 매니저에게 더 이상 정규 시프트 외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강력한 컴플레인을 했다. 그랬더니 그동안 많이 도와준 것을 잘 알고 있고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며 정규 시프트까지 푹 쉬라는 너무도 쿨한? 대답이 돌아왔다. 만약 그냥 참고 버텼다면 알아주는 이도 없이 내 몸만 아작이 났을 것이다.